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소년 만화가

김성환은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동순은 1919년 김상욱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해 부단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창덕궁 인근에서 변복한 일본 형사들에 잡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청진감옥에 10년 가까이 투옥한 끝에 출옥했다.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김동순은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귀농조합을 결성하고 가족과 동포들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로 만주국에 협력한 친일파로 몰려 대한민국 건국 후 유공자가 되지는 못했다.

김성환은 만주에서 돈화국민우급학교와 지금의 중학교 격인 길림6고를 다녔다. 

해방이 되던 1945년 11월 경 서울로 내려와 지금의 고등학교 격인 경북중학교에 다녔다. 

만주에서는 제법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재산 한 푼 없이 내려온 서울 생활은 몹시 궁핍했다. 

몸 누일 공간도 없어서 여기저기 빈방을 수소문해가며 남의 집 살이를 했다. 

막 일을 하러 나간 부모님을 기다리느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김성환은 방바닥이나 흙바닥에 매일 그림을 그렸다. 

만주에 있을 때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던 김성환은 서울에 와서도 금방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다. 

교내 대표로 전국학생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고 미술부 부장을 맡기도 했다.

회화가 주였지만 만화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당시 신문에는 김규택의 ‘정만서’ 김용환의 ‘깡통여사’ 등의 만화가 연재됐다. 

하지만 몇 회 실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김성환은 자신이 직접 만화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당시 ‘연합신문’에 ‘멍터구리’라는 제목의 네칸만화를 그려서 투고했다. 

첫 작품부터 반응이 좋았다. 신문사 부장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학비를 대주겠다’며 만화를 계속 그려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환은 만화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고 선배 만화가 김용환이 편집을 맡았던 ‘화랑’ 잡지의 전속만화가가 된다. 

열일곱 나이에 당시 돈으로 매달 1만원씩을 받는 프로작가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되자 궁핍한 생활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젊은 사람들은 인민의용군에 끌려갔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은 조선미술동맹에서 북한군 선전 만화를 그려야 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른 만화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던 김성환은 남들이 찾을 수 없는 다락방에 숨어 지냈다.

1950년 9월 28일 국군이 서울수복에 성공하자 다시 바깥 활동을 재개했다. 

윤효중(조각가) 등이 발행한 ‘만화신보’에 참여했고 ‘신태양’ ‘희망’ ‘학원’ 등에도 작품을 실었다.

 또 김병기 화백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면서 계몽포스터와 삐라, 주간만화잡지 ‘만화승리’ ‘육군화보’ 등에 참여했다. 

당시 미술대 내에는 화단의 중진들로 구성된 종군화가단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김성환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작품 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랑의열매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사랑의열매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전쟁의 참혹상을 기록하고 현실을 위로했던 만화가

김성환은 전쟁 통에 숨어 지냈던 다락방에서 200여 명 이상의 만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전쟁통이었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미래에 그릴 만화 작품의 주인공을 그렸다. 

김성환을 대표하는 ‘고바우 영감’ 역시 이 시기에 스케치해뒀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전쟁통에 김성환이 그려야 했던 그림은 북한군의 만행을 비판하고 국군의 활약상을 과장되게 알리는 각종 선전만화와 삐라가 전부였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작품뿐이었다. 이 같은 작업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던 김성환은 수차례 미술대원으로서의 임무를 회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군과 함께 전국을 떠돌면서 목격했던 전쟁의 참혹상을 화폭에 담는 일만큼은 놓지 않았다. 

흑백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김성환은 한 장의 스케치로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러는 중에도 창작만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1951년 대구에서는 소설가 방기환과 함께 '도토리용사'라는 아동만화를 그려 호평을 받았다. 

남향문화사에서 발행한 '사육신', '도마스목사얘기' 등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붓으로 작업했던 '사육신'을 보고 당대의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이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952년에는 시인 김소운 등과 함께 성인만화잡지 형식을 취한 ‘만화만문전람회’, ‘만화천국’을 도맡아 발행했다.

1953년에는 학생잡지 ‘학원’에 '꺼꾸리군 장다리군'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창작만화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아동교양만화나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사만화 일색이던 당대의 만화계에 큰 화제를 불러왔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두 친구의 학원 생활기를 연재물 형식으로 그렸다는 것도 종래에 볼 수 없었던 시도였지만 청소년 독자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도 특이했다.

1954년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집 ‘세태만상’과 ‘캐리카튜어’를 연 이어 발표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단행본을 성인을 위한 최초의 만화책으로 간주하고 ‘혼란과 무질서로 황폐한 오늘의 기류’를 위한 ‘예리한 비평의 메스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성환은 같은 해 ‘경향신문’에 ‘막동이’를 연재한 후 1955년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을 발표했다. 

이후 ‘세모돌이 네모돌이’ ‘소케트군’ ‘빅토리 조절구’ 등을 발표하며 아동, 청소년, 성인에 이르는 전 연령층을 독자로 한 만화가가 됐다.

절대 권력에 맞서 50년 간 전쟁을 치른 시사만화가

김성환을 대표하는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육군본부가 발행한 ‘사병만화’에 첫 선을 보인 후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 연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1980년부터), ‘문화일보’(1992년부터)를 거치며 50년 간 총 14,139회 연재된 최장수 4칸 시사만화이다.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고바우 영감은 뾰족 솟은 머리칼 한 올로 감정을 표하고 수염에 가려진 입으로 지배 권력을 비판했다.

초기에는 무언만화 형식의 유우머에 집중했으나 이내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풍자와 날 선 비판이 주류를 이루며 ‘김성환만화=고바우영감’이라는 등식이 만들어 졌다. 

성과와 과오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4?19민주혁명으로 막을 내린 이승만 정권, 5?16군사정변과 12?12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졌던 한국의 현대사는 부정하기 어려울 만큼 혼탁했다. 

한치 앞을 예단하기 어려운 시기를 고바우 영감은 특유의 걸음으로 돌파했다. 

어느 사이 영감은 우리 사회의 권력과 비민주적인 것에 맞서 싸우는 투사가 됐다.

1958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는 김성환이 서울시경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고 같은 해 1월 23일자에 그린 ‘고바우 영감’ 만화로 인해 입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만화 내용이 ‘국가에 대한 조롱이 담겨있고 불순하다는 이유로 경범법 위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신문만화가 본시 사회풍자를 지향하는데다가 만화 자체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데도 이를 악의적으로 곡해하고 수사기관에서 입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은 선거 대비용이라 논하며 ‘어디까지나 사회의 어지러운 현상을 풍자를 한 것이지 경무대를 모욕할 의사는 추호도 없는 것이며 또 결과적으로 모욕이 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김성환의 입장을 전했다. 

벌금형으로 끝난 이 사건 이후로도 김성환과 <고바우영감>은 권력의 북이라도 되는 양 시시때때로 두드려 맞았다. 

하지만 고바우의 머리털이 구부러질지언정 김성환과 영감님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탄압이 있으면 또 그 사건을 만화화하는 방식으로 절대권력과의 싸움에 물러섬이 없었다.

고바우가 인기를 끌면 끌수록 정부의 검열과 통제 수위도 높아졌다. 

경무대(당시 청와대)의 절대권력을 비판하는 만화나 재벌그룹을 위한 법 개정을 비판하는 만화로 인해 즉결재판과 벌금형을 받기도 했고 군사정부를 비판한 내용으로 인해 괴인들의 미행, 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취조와 공갈 협박 등을 받기도 했다.

1963년 AP통신이 ‘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고바우를 소개하고 군사정부의 언론탄압 소식을 전하면서 고바우는 국내외로부터 주목 받는 만화 주인공이 됐다. 

이후 군사정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고바우가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은 한국에서 특종이 터지는 날(무언가 정부가 감출 일이 생긴 날이라는 의미)’이라는 말이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떠돌기도 했다. 

고바우는 그렇게 한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14,139건의 정치사회적 사건사고를 풍자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중 백미는 1960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만화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결의했다는 기사가 1면에 실린 이날 ‘고바우영감’(1840회)은 달라질 세상에 대한 안도의 한숨과 함께 ‘검열제가 철폐되어 이젠 나를 찾았는데/ 그동안 많이 상했구나.’라며 기대 또는 또 다른 걱정이 담긴 한마디를 내 뱉는다.

 이를 4칸 안에 담기 위한 연출 방식 역시 돋보인다. 점점이 사라졌던 고바우의 모습이 원상태로 돌아오지만 마지막 컷 속에서 거울을 보는 고바우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를 또 십 수 년, 반백년을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와 싸웠던 고바우는 2000년 ‘문화일보’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하며 고바우 또는 김성환이 걸었던 길을 묘사한다. 

그 혹독했던 시기를 ‘춘풍(春風)’이라 했고 ‘추우(秋雨)’라 기억하며 사람들의 ‘건강’을 빌었다.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자로 ‘고바우 영감’의 연재를 종료한 김성환은 이후 풍속화가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릴 일 없는 과거의 한 시기를 정밀한 기억과 고증으로 풀어 낸 풍속화 연작,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서화 등을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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