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툰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경우에 카툰은 만화를 대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단체의 영문 명칭은 ‘Korea Cartoon Association’이고 만화가들의 영문 직업명도 ‘Cartoonist’이다.

 최근 한국 만화의 혁신과 발전을 상징하고 있는 웹툰 역시 Web+Cartoon의 준말이다. 이렇듯 카툰은 ‘만화 중의 만화’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경우 카툰은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소비되는 만화문화와 산업의 변방에 있는 고전적 장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카툰을 이야기할 때는 ‘지금 여기서 말하는 카툰은…’ 어떤 것으로 제한하는지부터 시작해야 한다. 

용어에 대한 정의와 갈래나 범주에 대해 늘어놓다보면 어느새 주어진 지면은 바닥이 드러나고 논점은 희미해지고 만다. 이 글 역시 그런 곤란함에 대한 고백으로 출발한다.

카툰아 간밤에 잘 잤느냐!

2014년 6월 23일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자사 웹툰 서비스의 10주년을 자축하며 그간 공표되지 않았던 다양한 데이터를 인포그래픽 형식으로 발표했다.

2014년 7월 오픈한 네이버 웹툰의 글로벌 서비스를 앞두고 진행된 이 캠패인은 ‘한국형 디지털 만화 웹툰’의 글로벌 출정식이었다. 

누적 조회수 292억 회, 1일 이용자 620만 명. 1달 7,800만 원의 고수익을 올린 웹툰작가가 등장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도전만화’ 코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가 14만 명에 육박하였다. 

단행본으로 발행 된 작품이 142타이틀, 영상물로 제작된 작품이 37타이틀, 게임으로 제작된 작품은 10타이틀이었다.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 같은 수치는 한국만화 100년의 끝자리에서 탄생한 웹툰이 일궈낸 지난 10년의 성과였다.

‘웹툰작가가 된 만화가’ 양영순의 표현을 빌리자면 웹툰은 그야말로 ‘21세기 만화 혁명’이다. 

그런데 이 10년 동안 인쇄출판분야에서 출발한 한국만화의 역사성과 정체성은 송두리째 뿌리 뽑혔고 탈탈 털려 정보통신분야로 옮겨졌다.

물론 그 뿌리 중 일부는 아직 전통의 땅에 박혀 있고 ‘성공한 혁명’의 혼란 속에서 자식 잃은 애비마냥 실의에 빠져 있다.

80년대 한국만화의 적자였던 극화는 ‘찍었다하면 2만부가 나갔다’. 지금은 무협극화와 성인극화로 세분화되어 종당 400부를 찍으면서도 살아있다.

90년대를 이끌었던 코믹스잡지도 주간 10만부 판매가 거뜬했다. 

지금은 격주간 2천부 가량을 겨우겨우 찍으며 버틴다. 

그나마 그 시절이 있어서 쌓였던 공력은 학습만화 기획출판 시장의 등장으로 말끔하게 소진됐다. 

만화의 세기말은 그렇게 왔고 21세기 만화세상은 변화의 두려움 속에서 열렸다.

 만화의 주무대였던 신문, 잡지, 단행본은 여전히 발행됐지만 더 이상 만화가를 찾지 않았다. 

방송이 만화의 표현요소를 받아들이고 영화가 만화적 상상력을 제 것처럼 현실화 시키고 게임은 또 하나의 만화임에 분명해 보였지만 어디에도 만화가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물론, 어떤 만화가들의 경우이다.

다른 만화가들은 신문의 좁은 지면을 확장하는데 성공했고 또 다른 이들은 잡지의 제한된 형식을 부셨으며 더 다른 이들은 단행본의 풋내 나는 유통망을 시원하게 넘어섰다. 

극화작가도 코믹스작가도, 학습만화작가나 순정만화작가도. 하물며 신문만화가도 모든 미디어의 용광로가 된 인터넷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뉴미디어 시대의 자판기 역할을 하고 있는 포털웹툰 속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참여 작가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수의 작가들은 가뿐하게 ‘외제차 모는 웹툰작가’가 됐고 대다수의 작가들이 그 결과를 목표로 정진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만화가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더 이상 ‘매체가 찾지 않는다’하면 매체가 없다고 하고, ‘배운 재주는 쓸 때가 없다’ 해도 이미 익힌 재주를 쉬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

‘소비할 사람이 없다’는데 오히려 팔 방법이 있다며 자신하기도 한다.

 누구일까? 웹툰의 시대, ‘웹툰작가가 되지 않은’ 그들은 카툰작가들이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누군가의 표현대로 자존심만 남은 이들의 생존 방식일까? 먹고 자는 것 따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요즘 세상에도 그들은 ‘간밤에 잘 잤느냐’고 묻고 ‘밥은 먹고 다니냐’며 인사한다.

카툰, 작지만 강한 만화 중의 만화

옛날은 좋았을까? 원로 카툰작가 김마정은 ‘옛날이라고 뭐 좋은 날 있었냐!’며 시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카툰이 원래 그런 장르라 했다.

 한국 카툰계의 최고 선배격인 사이로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좋은 시절이 있었다’며 잡지의 시대와 스포츠신문의 시대를 언급했다.

 과거 대중잡지나 교양지 할 것 없이 적당량의 만화 연재물을 게재하고 있었다.

 연속되는 칸과 복수의 페이지로 구성된 이야기만화가 주를 이뤘지만 한 칸 또는 한 장으로 구성된 만화 즉, 카툰이 여러 편 게재되기도 했다.

 잡지의 경우는 권두언 형식의 카툰 일러스트, 목차 페이지에 위치했던 에디토리얼 카툰, 간지 형식을 취하거나 모음 코너 형식으로 게재됐던 유우머 카툰 등이 있었다.

오피니언 형태의 외부 기고 카툰이나 독자 카툰까지 그 유형도 다양했다. 신문의 경우는 1칸 정치만평, 4칸 시사만화를 중심으로 스포츠 카툰, 유우머 카툰, 숨은그림 카툰 등이 게재됐다.

원로 시사만화가 김성환은 이런 유형의 만화를 ‘신문의 창(窓)’이라 부르기도 했다.

 만화가 문자로 빽빽했던 신문의 숨통 역할을 했다는 의미였다.

신문과 잡지가 번성하던 시절, 각 매체마다 카툰이 서너편 연재됐으니 그 시절이 카툰의 전성시대라 할 법하다.

 그런데 내용이 정치성, 시사성, 시기성을 지니는 경우는 카툰 중에서도 시사카툰 또는 시사만화로 분류됐다. 

이 분류의 작가들은 대부분 신문사에 편집기자 또는 미술기자로 근무하면서 고용창작을 했다. 

언론인으로 분류되기도 했고 한국시사만화가회, 전국시사만화협회에 소속됐다. 

자유직으로 고료창작을 하면서 카툰작가라는 차별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은 별도의 단체인 한국카툰협회에 모여 있다.

 결국 만화라는 큰 범주에서 한 칸으로 구성된 형식을 취한 카툰이 갈라져 나오고 거기서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는 시사카툰이 또 분할되고 남은 것이 곧 지금 여기의 카툰이다. 

범만화를 한판의 피자로 본다면 8등분 한조각도 채 되지 않는 지형이다.

그럼에도 카툰작가들은 대중잡지 <아리랑>(1955년 창간)과 교양지 <뿌리 깊은 나무>(1976년 창간)를 탯줄로, 만화전문잡지 <만화광장>(1986년 창간)과 <주간만화>(1987년 창간)를 통해 성장했다.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에 이은 <스포츠조선>(1990년 창간)의 창간으로 스포츠신문 만화경쟁이 일면서 카툰은 나름의 이정표를 세우는데 성공했고 경제 활성화 시기에 기업 사보 발행 붐이 이어지면서 카툰은 인쇄매체의 창이자 꽃이 됐다. 

크게 번성한 적도 없지만 독자적 매체를 지니지 않았던 탓에 과하게 위축될 일도 없었던 카툰은 주어진 작은 텃밭을 잘 관리하면서 자가발전을 계속했다. 

한국카툰협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서울카툰회가 1991년 결성됐고 서울국제만화전, 대전국제만화전 등의 카툰공모전과 전시행사가 뒤이어 열리면서 카툰은 한 때 만화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대학에 만화과(공주대 만화과, 1990년 신설)가 생기자 카툰은 만화의 알파벳이자 만화교육의 기초 방법론으로 선택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카툰은 작가 수련(만화학과)→작가 교육(전공교과)→작가 데뷔(공모전)→작품 소개(전시)→작품 활동(매체)에 이르는 카툰 생태계를 외부와의 연계 속에서 구축해내는데 성공했고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을 수립한 듯 보였다. 

그러나 외부와의 연계를 통해 구축한 생태계는 작은 균열에도 전체를 위태하게 만들었다. 

국제금융위기로 사보 폐간이 줄을 잇고 인터넷컴퓨터와 이동통신 활성으로 인쇄매체가 위축되면서 독서인구가 급감하자 생태계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정적 매체는 사라졌고 카툰공모전과 전시회는 페스티벌화 된 대형 이벤트 앞에 존재감을 잃었다. 대학의 만화교육 역시 만화문법과 만화미학 중심에서 창작 실기 중심으로 전문화되면서 서사만화에 제 역할을 넘겨줘야 했다.

카툰의 위기였다. 하지만 카툰은 누구보다 빨리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 

젊은 작가들은 디지털카툰을 들고 나와 전시장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걸기 시작했고 중견 작가들은 대중의 곁으로 다가가 만화예술향유교육을 진행했다. 

원로 작가들은 지역 정관계를 중심으로 카툰을 활용한 도시이미지 조성 사업을 제안하고 실효적 진행을 지원하기도 했다. 

백조의 물갈퀴질에 비견할만한 적극적 움직임이었다.

카툰작가들의 활동 확대에는 조관제의 역할이 컸다. 서울카툰회 회장을 역임한 조관제는 협회 소속 작가들과의 연계를 기반으로 1995년 만화전문기획사 카툰피아(현 대표 조희윤)를 설립했고 1998년 지역을 기반으로 부천만화정보센터(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를 개소하는데 일조했다. 

이 같은 공력은 그대로 한국카툰협회에 집중됐고 친정 체제를 구축한 카툰피아, 최근 설립된 사회적협동조합 카툰캠퍼스에 이르기까지. 범만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활동 영역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같은 동력은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들의 시도는 도도하고 영리한 백조의 실험쯤으로 치부됐다. 

그들의 참여는 일회성 교양 교육으로 박수 받는 선에서 끝났다. 

큰 그림 차원에서 추진했던 도시 이미지 조성사업 역시 여느 이벤트처럼 아이디어를 빌려주는 선에서 반짝하고 말았다. 그나마도 위대했으나 결과적으로 카툰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

카툰, 웹툰시대에 살아남기

카툰작가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아이디어와 펜만 있으면 어디든 그릴 수 있었고 청탁자에게 작품을 넘기기만 하면 입금이 되던 그 시절과는 활동 환경이 다르다. 이

미 세상의 변화를 직감하고 대안적 노력을 경주했지만 여전히 카툰은 어렵다.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긴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원고청탁 대신 들어오는 각종 주문과 요청이 원고료가 입금되는 것처럼 깔끔하지 않다.

 액면도 소액이어서 품위유지는 물론이고 생계도 어렵다. 

아이폰과 앱스토어가 열어 준다던 신세계는 도대체 어디 갔을까. 

본업은 카툰작가이고 부업으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판이다. 오히려 카툰작가라는 것은 사회적 직함에 불과한 경우도 허다하다.

원로들이야 아이들도 다 키웠을 테니 한시름 놓았겠지만 아직 자녀 양육과 부모 부양이 걱정인 중견들은 눈앞이 캄캄하다. 

결혼도 못한 젊은 작가들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신규 작가진이 들어오지 않아서 10여 년 이상 막내 작가로 있는 카툰작가를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찌해야 할까. 만화의 알파벳이자 만화 중의 만화인 카툰은 두렵다. 

전처럼 또 한 번 특유의 촉수를 드밀어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고 구체성 없는 빈 들판에 깃발을 꽂아야 할까. 

또 다시 달라진 매체환경과 소비환경을 역설하며 ‘새로운 카툰의 지형’을 향해 가자고 선언뿐인 설득에 나서야 할까.

첫째는 카툰의 활동 영역 구체화이다.

인쇄 기반의 카툰 연재매체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카툰의 주 활동영역은 인쇄매체이다. 

이를 기반으로 인터넷신문이나 웹진 등의 디지털매체, 이미지 모음이나 이미지 신디케이션 같은 디지털서비스, 갤러리 형식의 미술관 전시, 캐릭터 상품류와 같은 아트상품 라이센스, 도시 이미지 정비차원의 스트리트 아트, 문화예술 교육이나 향유교육차원의 카툰 교육 등이 카툰 또는 카툰작가가 수행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일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세분화하여 카툰의 활동 영역을 구체화하고 이를 협회차원에서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이 곳 카툰의 미래 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카툰작가의 수익 포트폴리오 재구성이다.

카툰작가의 기본적인 수익은 정기 연재고료 또는 간헐적 청탁에 의한 고료일 것이다. 

정기적 수익은 지속화 시키고 간헐적 수익은 정기적으로 전환 시키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전시작품 초청료, 작품 판매료, 기존작품 라이센스 사용료, 출판인세나 디지털저작권 판매수익, 외부 출장 작업비, 교육 강사료 등이 있을 수 있다.

 카툰의 활동 영역과 함께 카툰작가의 수익 포트폴리오를 구체화하고 이를 기준으로 작가 개인의 활동 시간이나 비중을 관리하는 것 역시 필요해 보인다. 

작가별 편차나 경우의 수가 많을 수 있지만 최고치의 목표 지향적 요소가 정비되고 일반화 된다면 내부 롤모델이 마련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카툰작가의 디지털 경쟁력 강화이다.

누군가 지금 우리세대는 컴퓨터를 모르는 세대, 컴퓨터를 쓰는 세대, 컴퓨터로 먹고 사는 세대가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카툰작가들 역시 그 삼대가 함께 어깨싸움을 하며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인쇄매체가 디지털매체로 전환되고 유일무이한 작품의 존재감보다 디지털로 복제된 작품의 최대 노출수가 더 큰 존재감을 주는 시대가 됐다.

 아이디어 발상부터 작품의 창작 및 재활용까지 일련의 작품 프로세스나 작품의 생애주기, 가치사슬을 디지털 기반으로 전면 개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디지털화 되어 있지 않은 이가 일부러 디지털화 되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디지털 경쟁력이라는 것은 디지털 활용능력의 강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비 디지털(non digital)’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 단, 디지털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논 디지털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날로그의 정서와 이를 기반으로 한 메시지는 더 이상 디지털 소비 세대의 시선과 마음을 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카툰 프론티어 그룹 육성이다.

여전히 각종 만화 공모전에서 카툰은 만화 중의 만화로서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

 국내에서는 신예 등용문으로 활용되기도 하지만 해외 공모전의 경우는 초청작가전 같은 성격도 지니고 있어서 카툰작가 간 국제교류도 어느 만화분야보다도 활성화 되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젊은 카툰작가들의 등장은 그리 많지 않다. 

다수의 공모전 입상자들이 이야기만화를 위한 계단쯤으로 카툰을 인식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활동 공간이 제한적이어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탈하기도 한다. 

이들을 소중히 해야 한다. 이들의 유입을 독려하고 활동을 격려하고 이들과 함께 서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기존작가와 내일의 카툰을 만들어가는 것보다 신진작가가 미래의 카툰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다섯째는 카툰의 텔링 방식 변화관리이다.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것 같다. 

디지털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신진작가 그룹이 등장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카툰의 정의와 문법 그리고 용례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디지털시대의 탁월한 스토리텔러들을 논외로 하더라 지금 이 세상에는 비선형적 요소와 자유로운 사고체계를 바탕으로 한 각양각색의 이미지텔러들이 등장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이 이미지들의 무덤 속에서 카툰을 통한 이미지텔링은 나름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이는 기존의 이론을 정리하고 오픈 된 신기술을 수용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실험을 진행한다고 해서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신의 한 수’라고 할 법 한 새로운 사고체계와 정서, 창조적 발상력과 획기적 표현력 그리고 디지털시대의 스타쉽을 두루 겸비한 작가가 카툰의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 기존의 카툰세상을 파괴적으로 혁신(Disruptive Innovation) 할 수 있는 이가 등장했을 때 가능한 변화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우리 중에 그런 파괴적 혁신가가 없다면 그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올 때까지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연구 개발을 다하며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길게 왔다. 카툰이 처해 있는 현실을 찾아보고 카툰이 번성했던 시절을 논해봤다.

 그리고 현장 밖에서 본 평자의 시선으로 카툰의 미래를 위한 몇 가지 정책 요소들을 제안해 봤다. 

그러다보니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졌다. 때때로 총탄 날리는 전장에 있는 열혈 병사보다 전화기 붙들고 앉아있는 속편한 통신병이 전장을 더 넓게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임했다.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여러 시선 중 하나로 이해 바란다. 이 중 한 줄이라도 미래의 카툰과 카툰세상을 도모하는 데에 쓸모가 있었다면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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