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김제동(사진=KBS 제공)

 

최근 방송 연예인 김제동의 고액 강연료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대전 대덕구청 초청으로 열린 2시간 강연 행사에 그는 1,550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와 비슷한 강연료 액수가 속속 드러나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김제동은 6월 6일자 방송에서 강연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모교에 1억 가량 기부했다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의 강연료가 정치쟁점화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17일에 김제동의 강연료가 “정권 출범 기여에 보답”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신보라 청년최고위원은 “잘못된 세금 운용은 환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이들 주장에 딱히 근거는 없다.

고액 강연 논란을 정쟁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것은 소모적이다. 과거 자유한국당 소속 자치단체장이 있었던 경북 예천군도 김제동을 초청해 강연료 1500만원을 지급했다. 이처럼 고액 강연료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 일부 공직사회에서는 이러한 고액 강연이 부정 청탁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런 일들이 문제가 되자 김영란법을 통해 대학교수도 시간 당 최대 100만원의 강연료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강력한 규제가 도입되었다.

이런 사례를 통해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것은 결국 제도와 정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논란을 기해 방송인 개인에 대한 도덕성 시비에 매몰되기보다는 고액의 강연료로 대표되는 이른바 ‘경제적 지대’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하고 싶다.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하자. (지자체의 예산 사정과 별개로) 김제동이 받았던 강연료 액수는 그 자체로 과도한 수준인가?  강연 업계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김제동보다 덜 유명한 연예인의 경우에도 강연료는 물론 두어 곡 분량의 콘서트 섭외료도 천여 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여기에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다. 한 두 시간의 강연처럼 일견 큰 노력이 들어가지 않는 일에 남들이 서 너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보상을 주는 것은 언어도단 아닌가?  하지만 주류경제학은 이것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방송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의 강연료나 섭외료는 일종의 ‘경제적 지대’의 성격을 띤다. 경제적 지대란 공급이 제한적인 반면 수요가 큰 재화나 생산요소가 누리는 일종의 초과소득을 의미한다. 예컨대 한 연예인이 인기를 구가한다고 해도 다른 보통의 재화처럼 그와 같은 외모, 말투, 성격을 가진 사람을 복제해서 시장에 공급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경제적 지대란 이처럼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자원에 지불하는 일종의 프리미엄이라 할 수 있다.

메시 / FC 바르셀로나 트위터 캡처
메시 / FC 바르셀로나 트위터 캡처

슈퍼스타의 경제학에 따르면 이런 현상이 극대화되는 곳은 연예계와 스포츠계이다. 올해 1월 기준 연봉 세계 1위를 기록한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의 경우 합계 1,220억 원의 연소득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축구선수의 화려한 발놀림과 더불어 연예인의 매혹적 몸짓과 표정이 갖는 공통점은 ‘대체 불가능성’에 있다. 

임의의 보통 선수 여럿이 기록한 골과 어시스트가 1년 동안 메시가 기록한 것과 동률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들의 몸값을 합쳐봤자 대부분 메시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최고’의 선수를 보려는 대중의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메시의 대체재를 찾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슈퍼스타 현상’이 성립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이 있다. 대중매체의 발달이다.  메시의 경기와 BTS 공연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 이처럼 슈퍼스타의 재능과 개성을 저렴한 비용에 대규모 시장을 상대로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여기에 대규모 광고시장까지 따라오면서 승자독식 현상은 심화됐다. 새로운 매체로 각광받는 유투브도 예외는 아니다. 거기서도 상위1% 유투버만 억대 연봉을 벌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소득을 얻는다. 

 

물론 혹자는 김제동이 메시나 BTS만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비판은 아니다. 메시급 ‘슈퍼스타’까지 안 가더라도 소수 유명인이 높은 주목도와 몸값을 누리는 데 필요한 재능은 대중의 시류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가령 소비자들은 김제동의 강연에서 전문적 지식과 정보를 얻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의 캐릭터와 언변을 보고자 강의 현장에 온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연예인이 웬만한 저명 대학 교수보다 높은 강연료를 받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아마 기안84가 경제학에 대한 아무 말 대잔치 강연을 하더라도 흥미만 자아낸다면 충분히 김제동 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강연료가 책정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열심히 경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강사들은 열 받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스타가 벌어들이는 고소득 이면의 경제논리와 별개로 이 현상에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들의 박탈감은 아마 경제학을 더 전문적으로 공부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고액 강연료 논란이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이 있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사람들이 ‘경제적 지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기에 민감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지대 배후에 있는 ‘공급의 비탄력성’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 독점과 부당거래에 의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경제학자 자신들의) 생각보다 어렵다는 데 있다.  어렵긴 하지만 그 둘의 구분은 공정성의 견지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 경제학자는 한 칼럼에 그 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빗대어 말한다.

“슈퍼스타는 본인이 개발한 능력·노력·자질 등을 투입하고 있지만, 재벌3세 등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투입하고 있다.

” 하지만 최근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슈퍼스타의 재능은 물론 높은 시험성적조차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배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 또한 재벌3세도 재벌3세간의 서열 경쟁을 위해 나름의 자기계발을 한다.

이처럼 재화 자체의 자연스러운 속성에서 비롯된 경제적 지대냐, 아니면 인위적 조작으로 발생한 독점적 지대냐의 경계는 생각보다 희미하다. 이 때문에 특정 연예인의 안티세력은 문제의 연예인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속사와 언론계 간의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인위적으로 스타가 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또한 대학가와 지자체의 강연시장이 소수의 공급자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고 불만을 느끼는 소비자들 역시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품는 이유는 그만큼 ‘불공정한 독점적 지대’가 현실에 만연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친 김에 말하면, 스포츠계와 연예계뿐만 아니라 고위 정치인과 경제계의 CEO 또한 막대한 규모의 지대를 누리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피케티는 2014년의 한 논문에서 여러 실증적 자료를 이용해 최고 경영자들이 자신들이 발휘하는 경제적 생산성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그 규모가 지난 30년 간 상위 1% 소득의 비중을 두 배 이상 늘려놓는 데 상당 부분 기여할 정도로 컸다고 봤다.  이때 그가 주목하는 것은 ‘최고세율’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공모관계다. 대다수 선진국의 경우 최고세율이 내려가는 바로 그 만큼 초고소득자의 경제 전체 소득비중이 늘어났다.

여기서 피케티의 설명은 이렇다. 최고세율을 대폭 인하하자 최고 경영자들은 과거보다 연봉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데 적극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들이 힘 들여 보수에 대한 협상을 해봤자 추가로 얻는 소득의 80~90%를 세금으로 뜯겼지만, 세율이 대폭 내려가자 이제는 자신의 영향력과 권한 그리고 정보력을 이용하여 더 높은 연봉계약은 물론 각종 보너스 규정을 만들어낼 유인이 생긴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최고 경영자들의 이러한 ‘지대 추구적 행위(rent seeking behaviour)’는 다른 경제주체들(종업원, 소액주주, 소비자, 등등)의 정당한 보수를 제물로 삼으며 이는 경제적 효율성마저 저해한다. 그리고 이들이 심화시킨 경제적 불평등은 거시경제적 불안정에도 상당부분 일조했다. 이는 경제적 불공정을 방지하는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으로 보여준다.

각자가 발휘한 노력과 생산성 그 이상의 경제적 보상을 추구하는 ‘지대 추구적 행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일탈행위로 간주하고 분노한다.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런 행위를 조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가장 핵심적인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컨대 강연료 시장의 소득 집중이 지나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개인에 대한 비난에 기대기보다 소득과 자산소유의 상한선을 도입하는 등의 근본적 대안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논의를 가로막고 자꾸 개개인의 도덕적 순결성을 도마에 올리는 자장 속에서 논의가 맴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소득의 적정 수준은 결국 사회적 통념과 규범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일찍이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시장가격’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양심과 윤리의식에 부합하는 ‘공정가격’에 따라 상품을 사고파는 것이 경제정의에 부합한다는 관점을 제출한 바 있다. 물론 모두가 양심을 따르면 앞서 문제시했던 지대추구적 행위는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아퀴나스의 이러한 견해는 일견 이상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그도 당대의 ‘교회’라는 제도적 장치를 염두에 두고서 그러한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 수백 년 후의 우리 현대인들도 암묵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일한 경제관을 공유한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것은 막연한 설교와 훈계가 아니라 개인의 행동을 실질적으로 규율할 제도와 이를 현실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정치’이다.

강연료 논란 배후에 있는 핵심적 정서는 ‘불공정’한 수준으로 벌려진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이다.그렇기에 좌우 여야를 막론하고 김제동 ‘개인’에 대한 비판/변호론에만 집중한 언론과 정치권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번 강연료 논란을 기해 상속세 및 최고소득세율 인상, 최고임금 및 부동산 소유 상한제 도입 등등, 경제적 불공정성을 실질적으로 억제할 수단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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