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규제는 국내 정치용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상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이다. 지난 7월 3일 토론회에서 아베 총리는 이 조치에 대해 “한국이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사실상 무역 보복 조치임을 인정했다.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쟁점을 정리해보자. 아베와 자민당 측은 후쿠시마 농수산물 수입규제와 징용공 배상 판결 등을 거론하며 한국이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공세를 연일 펼치고 있다. 심지어는 한국으로의 수출된 소재가 북한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베 총리의 프레임에 그대로 따라줄 이유는 없다.

문제의 대법원 징용공 배상 판결은 ’18년 10월에 이뤄졌고 올해 초 양국 협의가 이뤄졌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협의가 답보상태에 놓인 후 지금 이 시점에 돌연 징용공 배상 판결을 걸고 넘어진 것은 결국 국내의 정치적 필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베 패싱’ 논란이 일었던 G20 정상회담의 국면전환과 다가오는 참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자민당 내 강경파들의 입지를 넓혀준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장기전으로 확대되면 한일 양국 타격

일본의 부품·소재 업체들은 이 같은 수출규제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다’며 당혹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일본 네티즌 사이에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경제도 셀프 제재하는 것 아니냐’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럴만한 것이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가 일본 부품소재 업체들의 최대 수요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의 주요 에칭가스 생산자인 스텔라 기업은 제품 100%를 한국에 공급하기에 수출이 막히면 사실상 존폐의 위기에 서게 된다.

무역전쟁으로 일본의 완성품 제조 기업도 타격을 입긴 마찬가지이다. 수출규제가 확대되어 반도체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 생산에도 차질이 빚어진다면 이를 수요 하는 일본 기업에도 타격이 올뿐만 아니라 시장 전체에 혼란이 올 수 있다. 작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시장 점유율은 70%를 넘는다. 또한 지난해 삼성과 LG의 디스플레이 세계시장 점유율은 43%였으며 올레드 패널의 경우 점유율이 98%를 넘었다. 올레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 하이엔드 TV 생산 자체가 마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제 살 깎아 먹기를 각오하고서라도 수출규제 지속을 강행한다면 한국 기업에도 확실히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당장 국내외에서 대체재를 찾기 어려운 에칭가스 규제가 뼈아프다. 에칭 가스는 누출 위험 때문에 관리가 까다롭고 보관비용도 커서 국내 재고가 많지 않은 상황이다. 일부에서는 이달 안에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 이유이다.

단기적으로는 외교적 협의, 장기적으로는 부품·소재 국산화 필요

이와 관련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8일에 “기업 간 거래를 정치적 목적으로 제한”했다고 비판하며 “한국기업 피해 땐 필요한 대응”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추가적인 보복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외교적 협의를 통해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양국 정부와 기업계 사이에서 어떠한 타결책이 나올지 주목된다. 앞으로의 일본 내 참의원 선거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는 반도체·디스플레이는 물론 주요 산업의 부품·소재 국산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정부는 부품, 소재, 장비 산업 육성을 국가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일본과의 경제전쟁에 대비한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산업의 국민경제적 내실을 기한다는 의미도 있다.

보통 한 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 하지만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은 그 동안 부품·소재·장비의 국산화가 덜 된 탓에(반도체의 경우 소재 국산화율은 50.3%, 장비는 18.2%로 추정) 국내 경제의 파급효과가 제한적이었다. 2015년 기준 국내 제조업 전반의 고용유발계수는 5.56이었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각각 2.91과 3.18에 불과했다. 또한 반도체·디스플레이 호황기에도 관련 설비투자 수요는 상당부분 자본재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고용 없는 성장’이 논란이 되고 있는 지금 이 시점 유력 고부가가치 산업의 후방을 탄탄히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이미 자동차 부품에서도 일본에 의존하는 구도 일변도에서 탈피한 바 있다. 2008년에는 자동차 부품의 대일무역 적자가 8억 6천만 달러 규모였다면 각종 투자와 정책적 지원 덕에 2018년에는 8천만 달러 규모로 1/10 가까이 줄어들었다. 이처럼 대기업과 정부가 기술협력, 재정지원 등으로 부품·소재·장비의 국산화를 지원한다면 국내 중소기업 생태계 체질개선을 도모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사히 제공

 

민간의 한일 경제전쟁 확전은 피해야

일부에서는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응해야 한다며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간에서의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상징적인 제스처 이상의 의미를 가지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대일 무역에서 수입 수출 모두 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품 불매운동이 민간의 한일전 양상으로 확산되면 오히려 우리나라에게 불리한 양상이 된다. 2017년의 경우 만성적인 적자구조인 대일무역에서 소비재는 유일하게 흑자를 본 부문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일본은 3대 소비재 수출시장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 2014년 한국 소비재의 수입 비중은 3.1%에 불과했다. 일본의 내수시장은 우리로서는 대체하기 어려운 거대하고 매력적인 시장인 반면 일본은 간단하게 한국의 소비재를 대체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 차원에서 불매운동으로 강대강으로 부딪히면 우리가 손해를 본다.

일본 언론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중계하며 이를 한국 화장품과 기호식품을 소비하는 일본의 10·20대 여성을 대조시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일본 내 반한감정과 더불어 경제적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노림수이다.

서로 협력·공존 관계에 있던 한일 양국의 산업계를 볼모로 잡아 정쟁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애초에 아베 정부였다. 이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이를 산업계 간의 충돌로, 더 나아가 한일 민간의 문화적 충돌로까지 확산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또한 일본 제품을 살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소비자 자신의 선택이다. 일본 여행자와 일본제품 소비자를 비난하는 것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 아무런 실익이 없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냉정을 잃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대응하되 이성으로 설득하고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감정표현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절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힘으로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명분을 잃으면 되잡히게 됩니다. 지나치게 감정을 자극하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는 특히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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