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한 이유 중 하나로 저금리를 드는 주장이 있다. 저금리로 인해 국채를 발행하는 부담이 크게 줄었고 그렇게 해서 마련한 재원으로 최첨단 군함을 조달하여 최강의 해군력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금리가 낮아진 계기가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왕들이 국가의 채무를 제대로 상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의 신용이 떨어져 금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명예혁명으로 왕이 증세나 국채 발행을 할 때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되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채무불이행이나 연기 같은 사고(?)가 없어져 신용이 높아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금리가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민혁명의 효과라 하겠다.

명예혁명의 긍정적 효과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혁명으로 아내 메리와 함께 왕위에 오른 공동왕 윌리암 3세는 15,000의 병력과 함께 각종 기술자들 그리고 금융전문가들을 대동하여 영국에 입국하였다. 윌리암 3세의 조국인 네덜란드는 당시 이미 금융업이 발달하여 유럽 금융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금리의 저하는 그가 데려온 금융전문가들이 도움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니 윌리암의 선택은 영국에게는 신의 한 수였다고 할 수 있다. 훗날 런던의 금융시장 이 유럽의 금융의 중심이 된 것의 출발은 아마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이때 금융의 중심이 되어 있었을까? 그것은 땅이 바다보다 낮은 특성상 봉건제의 발달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표적 봉건영주인 성직자와 귀족 모두가 리스크가 큰 네덜란드 땅의 지배에 소극적이었기에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토지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등 토지제도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네덜란드인의 자유로운 기질은 이렇게 봉건제의 속박에서 일찍 벗어나 토지에 얽매이지 않는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봉건제발달로 토지에 속박된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금융업에 뒤떨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생산의 3요소는 자본, 토지, 노동이다. 생산을 함에 있어 3요소가 보다 저렴하게 획득될수록 유리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그런 점에서 자본을 보다 저렴하게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투자하려는 국제 자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투자 방해 요소가 노동이다. 강성노조로 인해 경제력에 비하여 높아진 임금 즉 노동조달비용이 그들을 발길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금융만이 아니라 노동비용도 자본조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말해 준다. 우리로서는 노조 리스크의 완화가 필요하다.

토지문제도 우리나라에 투자를 하는데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토지란 투자 대상으로서의 ‘부동산’이 아니라 수단으로서의 ‘부지’를 말한다. 우리처럼 토지 자체를 투자 대상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부지’를 조달하는 것은 국제 자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국인의 투자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건물주가 조물주보다 위라는 식의 농담이 흘러 다닐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생산을 위한 투자를 하기보다는 건물이나 토지를 사서 그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을 기대하는 심리가 더 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근대 유럽의 패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이른 시기에 봉건제의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토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네덜란드는 원래부터 봉건제의 속박이 적었고 그로 인해 유럽 각지에서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네덜란드를 동경해 몰려들었고 그것은 네덜란드의 자유로움을 강화시켰다. 스페인이 레콩키스타(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는 전쟁)를 완수하고 나서 종교적 관대함을 버리자 유대인을 비롯한 금융업자들과 기술자들이 네덜란드로 몰려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네덜란드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으니 자유와 인재영입에 의한 시너즈 효과라 하겠다.

영국의 경우는 네덜란드에 가까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혁명을 필요로 했다. 청교도혁명(1640-60)은 국왕 찰스2세를 사형시켜 봉건 세력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가하였고 명예혁명은 그것을 완성시켰다.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의 봉건제는 쉽게 해체되지 못했고 결국 영국의 영주들은 지주로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귀족의 자리를 차고 있지만 두 번의 혁명은 영업의 자유와 봉건적 억압을 상당 수준 약화시켰기 때문에 영국도 토지에서의 해방을 이루게 된다.

우리나라 우파들의 모순은 노동비용 감소를 주장하면서도 토지비용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민노총을 적대시하며 노동비용의 수준이 경제력에 비하여 높다는 비판을 하는 그들이지만 부동산 투기에 대한 규제에는 소극적이고 오히려 자유방임적인 입장마저 보인다. 그들에게는 토지도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투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하지만 한때 세계제일의 인구밀도를 자랑하던 네덜란드가 토지에서 해방된 것으로 인해 세계를 누비는 자유인으로서 하면서 유럽 유수의 강소국으로 발전한 사실을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토지비용을 절약해야 국제자본의 유치도 쉽고 또 국내 자본도 보다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탄생은 봉건제를 기반으로 한 토지 중심주의에서 해방되었기에 가능했음을 네덜란드와 영국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토지가 중요한 자산으로 위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묵과하라는 것은 우리나라를 계속 봉건제적 토지 중심주의에 묶어 두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토지 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산업혁명에 기여한 사례는 세계사적으로 봐도 일본의 사례가 거의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그것도 서양으로부터의 외압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인위적 결과일 뿐이다. 토지자본은 안정적인 수익을 영속적으로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여간해선 모험을 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만 해도 건물주들이 사업에 뛰어든 예는 (부동산제외)드물 것이다.

네덜란드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봉건제 타파를 통한 토지에서의 해방은 피의 혁명을 필요로 했다. 네덜란드조차 스페인의 억압을 벗어나고자 오랜 시간에 걸친 독립전쟁을 통해 피를 흘려야 했다. 우리는 1949년 농지개혁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봉건제에 의한 토지 중심주의에서 벗어났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토지에 속박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근대적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생산요소인 토지비용을 높이고 자본이 토지로 몰리기 때문이다.

요리연구가 한정혜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저축왕에 뽑혔다니까 돈을 엄청 벌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오해이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서울 중심의 금싸라기 땅(당시)을 사두었을 것이다. 나는 일년 내내 나의 작업장인 주방에 출근해 요리를 연구했고 그래서 돈 쓸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은행에 돈이 쌓여 상을 받은 것이다.” 어떤 부동산 분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한다. 모두가 부동산에만 매달리면 소는 누가 키우겠는가?”라 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말들이다.

토지에 얽매인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농업이 중심산업이 아닌 나라에서 농지도 아닌 토지에 자본이 묶인다면 생산에 동원될 자본은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네덜란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수단으로 토지에서 해방될 때 우리 경제는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규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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