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국내에서 출판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자본’은 불평등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토마 피케티는 1971년생의 프랑스 경제학자로서 장폴 사르트르 미셸 푸코 같은 세계적인 인물을 비롯하여 14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10명의 필즈상(수학의 노벨상)수상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학교인 그랑제꼴레(Grandes Écoles)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 후 사회과학고등연구원과 런던 정치경제학교에서 로제 게느리(Roger Guesnerie) 교수의 지도 하에 작성한 부의 재분배에 관한 논문으로 22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랑제꼴레란 일반대학인 위니베르시떼(Université)와 달리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 엘리트 대학이다. 바깔로레아라는 전국공통입시를 치러 일정 기준이상의 성적을 올리면 입학할 수 있는 일반대학과 달리 그랑제꼴은 바깔로레아에서 4% 내에 든 학생들이 2년간의 준비학교를 거쳐 콩쿠르라는 시험을 치뤄 성적에 따라 입학을 할 수 있다. 그랑제꼴 중에서도 파리고등사범학교는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할 정도의 최상위에 위치하는 학교로 정재계와 학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사범학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 교사양성학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물론 실제 그런 역할도 한다)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높은 학문을 가르치고 있다. 토마 피케티가 프랑스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짐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박사학위 취득후 피케티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경제학부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조교수직을 하다 1995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연구원이 되었으며 2000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미국 생활을 청산한 이유는 미국 경제학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박사논문이 부의 재분배에 대한 연구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성장에 주안점을 두는 미국식 경제학에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경제학은 미국에서는 더 이상 중시되지 않는 역사적 분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융합하기 어려웠다. 아담스미스 마르크스 등은 경제를 역사를 토대로 분석하였으나 현대 미국 경제학은 역사보다 수학을 이용한 분석을 주로 이용하고 있고 피케티는 자신이 수학에 뛰어난 경제학자임에도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피케티이기에 300년간의 소득자료를 바탕으로 ‘21세기 자본’을 통해 불평등의 역사를 보다 정확하게 쓸 수 있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20세기의 일시기를 제외하면 불평등은 계속 존재하였고 그러한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자산소득의 차이에 두고 있다. 자산에 의해 벌어들이는 소득이 노동소득에 비해 높기 때문에 쉽게 말해 “돈이 돈을 버는 상태”가 계속되니까 ‘세습’에 의해 소득이 결정되는 상태가 되며 이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세습자본주의’라는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자본주의발전을 저해하기에 시정되어야 하며 그 수단으로 글로벌자본과세와 보다 강화된 누진소득세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진보 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진보진영은 불평등을 수치화하여 명확하게 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자산소득에만 집중하여 노동과정에 있어서의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1%라는 초고소득층에 제한되어 전체적인 소득재분배문제를 전혀 다루지 못한 것 부과된 세금으로 얻어진 재원에 대한 용도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비판은 피케티의 처방은 너무나 한정적이고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보수진영의 비판은 피케티의 연구업적을 사실왜곡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일정하게 그의 업적을 평가해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을 넘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그들에게 불평등을 문제시하는 피케티의 시도자체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다. 심지어 사람들을 배 아프게 하여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는 선동가수준으로 평가하기조차 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장시간에 걸쳐 소득자료를 통해 얻은 소득분배자료뿐이지만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와 마르크스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피케티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그가 사회주의적이라는 전혀 맞지 않는 비판도 보인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철저히 지지하는 경제학자이고 ‘21세기 자본’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세습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것을 염려하여 집필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그들은 ‘21세기 자본’을 오독했거나 심지어 제대로 읽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자신들이 옹호하는 ‘불평등’을 비판한 것에 얽매여 이미 선입견에 빠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피케티의 ‘21세기자본’은 한국어판이 출판되기 전에부터 화제가 되었다. 한국경제신문은 피케티를 공격하여 기선을 제압하고자 하였고 보수진영은 피케티에 대한 비판서적을 먼저 출판하여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도리어 피케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와 그들의 작전은 역효과를 낳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안티도 팬이라는 말처럼 그들이 그토록 목청을 높여 그를 비판하니 도리어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필자도 그들의 비판을 통해 (한국경제의 정규재 컬럼 등) 토마 피케티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시라는 법칙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의 공격이 없었다면 대중이 그토록 어려운 학술서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을지 의문이 든다.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알티케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