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라는 유명한 기독교(개신교)인물이 서거했을 때의 일이다. 그에 대한 갖가지 미담을 전하는 기사가 여기저기의 신문을 장식하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필자의 관심이기도 한 그의 선행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가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이야기 특히 후배 목사들에게 입고 있던 양복을 벗어주었다는 식의 에피소드에는 마음이 찡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미담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일부 목회자와 그 가족에게서 제시된 의견을 소개하겠다. “한경직 목사야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보장을 해 주니 그럴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어렵다”라는 일종의 볼멘소리였다.

세상에는 이런 삐딱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누군가 선행을 통해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으면 그것을 일종의 압박이라고 여겨 불만을 터트리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상과 표창 포상은 다 사라져야 할 것이 아닐까? 보장을 받았다고 모두가 한경직목사처럼 남에게 베풀면서 사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은 적지 않으며 목회자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다만 그들의 불만에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 ‘보장받는 삶’에 대한 일종의 질시 또는 동경심이다. 오늘날 공무원이나 교사 군인 같은 직업이 각광을 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보장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년 후의 삶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삶은 부유하고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물론 그런 삶을 동경하기는 하지만- 바로 ‘보장된 삶’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안정기가 되자 사람들은 더 나은 삶보다 현재의 삶을 보장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이 유지하기 원하는 현재의 삶은 대한민국 중산층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소망이 부동산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고 한다면 지나친 결론이라 할 수 있을까? 마치 다이어트를 하다가 중단하면 요요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는 자산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고 그 수단으로 부동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비만증에 걸리는 것은 ‘보장’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대부분 기아와의 싸움으로 채워졌다. 현재처럼 포식의 시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몸은 굶주림에 대한 공포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도하게 흡수된 에너지를 체내에 축적하여 기아에 대비하는 것이 몸의 본능이다. 그 세월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포식의 시대가 되어 더 이상 에너지의 축적이 필요없는 지금도 몸은 여전히 같은 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비만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산을 늘려가는 것은 마치 몸이 에너지를 축적하려는 것과 같다. 몸은 기아라는 재앙을 위해 에너지를 축적하고 우리는 각종 재해와 노후를 위해 자산을 축적해 간다. 왜냐하면 그런 위험에 대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보장’이 주어지는 직업에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직업을 모두가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대안이 되는 것이 바로 자산의 축적이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부동산을 자산축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얼마 전 이 문제에 관련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스웨덴에 주거하는 한국인이 쓴 것인데 스웨덴 사람들의 세금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세금에 대한 저항감이 적고 오히려 세금 납부를 기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어느 스웨덴 사람이 상금을 받았는데 제법 높은 비율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을 때 “아깝지 않는가?”라고 묻자 “지금껏 도움만 받았는데 세금을 내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의외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국가에게 자신이 도움을 받는다는 의식 자체가 희박하고 그러기에 세금을 내는 것에 저항감이 매우 심하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댓글에도 긍정적인 의견보다는 비아냥이나 비판이 많이 달렸던 것도 그런 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스웨덴 사람이 세금을 기쁘게 납부하는 것도 한경직 목사처럼 ‘보장된’ 삶이 있기에 가능하지 모른다.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스웨덴 사람들은 막대한 세금을 납부하지만 삶에 대한 전반적인 ‘보장’(생로병사에 대한)이 주어지기 때문에 큰 불만이 없고 오히려 세금을 내는 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보장’을 가져오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죽을 때 유산을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상속세를 폐지하려고 한다. 서민들이 남기는 알량한 유산에 상속세가 무겁게 부과되어 상속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얼마 전 김형석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데 거기서도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법정, 한경직 그리고 김형석과 스웨덴 사람들의 공통점은 ‘보장된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즉 삶이 보장되면 소유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산을 축적하지 않게 된 그들의 삶은 마치 몸이 풍요로운 현대에 적응하여 에너지를 더 이상 축적하지 않게 된다면 비만이 사라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부동산 문제에 대한 장기적 해법이 하나 제시된 셈이다. 그것은 사회보장의 강화를 통해 ‘보장’을 모든 국민이 누리도록 해 주는 것에 의해 경제적 에너지의 축적을 통한 자산의 뱃살을 키우지 않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스웨덴 사람과 우리가 그리고 한경직 법정 김형석이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가톨릭의 신부나 수녀들보다 자산의 뱃살 키우기에 관심이 많은데 이는 그들에게 ‘보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동산 문제는 결국 ‘보장’이 부족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자산의 뱃살키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도 세금을 기쁘게 낼 수 있는 ‘보장사회’를 만들어서 자산의 뱃살 키우기에서 해방된다며 부동산 문제 역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무소유’의 사회가 아닐까 싶다.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지 않아도 안전한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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