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보수성향의 신문에 한 정부의 정책을 자유주의 시장 경제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담은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보수성향의 신문이니 그런 비판이 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논조가 너무나 이념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어느 교수의 글인데 일과되게 자유주의시장경제를 들먹이며 비판을 하는 것이 조금은 딱하게 느껴졌다. 필자는 이 컬럼을 교재로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면 안 되는가?’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우리가 자유주의시장경제를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내용이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옷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을 사람에 맞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의외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후보시절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가 우리가 모든 정책을 결정할 때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보수진영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필자가 진보정당의 정책연구소에 전임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시절에도 같은 문제에 봉착한 적이 적지 않았다. 좌파적 이념에 사로잡힌 동료들과의 끊임없는 논쟁으로 필자는 거의 고립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어 보였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념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필자는 선거출마를 명분으로 연구소를 사직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마지막 근무일에 열린 환송회에서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연구소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환송회에서조차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들의 이념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철저한 가를 보여준다.

필자의 이념을 굳이 말하자면 ‘좌파적 휴머니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좌파’를 앞에 내 건 것은 방법론적으로 좌파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하면 알아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우파적 의견에 절대 동의할 수 없으며 인위적 제도로 시장이 갖는 한계를 조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필자는 명백한 좌파이다. 하지만 좌파가 말하는 방법론의 한계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경쟁을 배제한 분배가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가져온 것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의 횡포에도 분노하지만 노동자들의 일방적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남녀평등을 존중하지만 극단적 페미니즘에는 찬성할 수 없다. ‘좌파적 휴머니즘은’은 이러한 필자의 사상을 잘 집약해서 표현한 이름이 될 것이다. 마음에 들지 궁금하다.

부동산 문제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부동산에 대하여 생각할 때도 이념이 아니라 부동산 정책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 집 마련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일까? 그것도 필요하지만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사람이라면 분명 유산자에 속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이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해서 점차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집 마련의 꿈조차 가지기 어려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주거권’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인간은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살아갈 수 있다. 그 중에 주의 문제는 가장 어려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은 일단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뿐 아니라 어느 정도 절약도 가능하다. 인간은 3,40일 굻어도 생존이 가능하나 추운 겨울에 거주할 곳이 없으며 하루 밤 만에 동사할 수도 있다.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 혹한이 심한 겨울밤이 지나면 동사자의 기사가 뜨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풍부한 시대에 먹고 입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주의 문제는 그에 비하여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노숙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숙자는 아니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주거의 문제이다. 예전에 알던 어느 할머니께서 “집 문제만 해결되면 어떻게 살 것 같아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기초 생활 수급자인 그분은 월세로 수급비의 절반 이상을 지출하고 나면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예전에 살던 안산에서는 기초생활수급자를 위해 저렴하게 주택을 제공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국가에서 민간 주택을 임차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한다면 그들의 삶이 훨씬 나아질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쉐어 하우스를 국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주거권’을 중심으로 주택정책을 수립한다면 부동산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주택을 재산의 하나로 여기거나 나아가 부를 늘리는 투자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거권이라는 인간의 기본권이 해결되는 사회라면 부동산 문제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고 재산권에 중점이 놓인 부동산 정책을 펴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전세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좋은 사례이다. 전세를 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과연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인지 모르겠다. 당장 들어갈 월세방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주거권’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보호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어느 정도 축소되어도 좋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상가의 경우 땀 흘려 일해 상권을 조성한 세입자들의 권리가 불로소득을 얻는 건물주의 재산권에 우선해야 할 것이며 (젠트리피케이션 문제) 전세를 못 구한다고 하는 하소연은 월세를 못 내 거리로 내몰릴 사람들의 고통보다 후 순위가 되어야 한다. 건물주의 불로소득은 억제되어도 좋고 전세 세입자는 월세로 이사해도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많은 비용과 노력으로 일군 사업자가 국가 경제에 훨씬 큰 공헌을 하고 있으며 월세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주거권이 훨씬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은 공리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은’ 자칫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권리를 짓밟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장애인 노숙자가 그런 소수 약자라면 우리 사회에서 월세살이를 하는 사람들 영세자영업자들이 잊힌 존재(전세 세입자들,(전세세입자들, 급여 생활자들에 비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그들의 하소연은 아닐까 싶다. 의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지는 ‘주거권’에 대하여 필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한 자그마한 공간이 안전하게 확보되는 사회가 진정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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