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저녁에게는 말을 아끼자 그 대신 빛을 풀어놓자 내 안에 꽁꽁 묶여 있던 빛, 어둠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달이나 해를 떠올릴 수도 없는, 어떤 말의 모습을 한 저녁에게는 넓은 백지를 하나 던져주자 그러면 백지의 옷을 입고 수많은 빛을 퉁겨내겠지 퉁겨낸 빛이 어떤 말을 하겠지

저녁에게는 한 번쯤 울어주자 그 대신 사소한 질문은 하지 말자 저녁이 저녁답게 어두워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자 저녁을 향해 뒷산의 갈대들을 조금씩 흔들어주자 갈대를 흔들어 붉게 충혈된 산자락의 눈시울을 달래주자

저녁에게는 한밤중이나 새벽을 물어보지 말자 새벽이 감추어둔 것들의 일기장을 궁금해하지 말자 저녁 하늘을 날아갈 새들의 행방을 미리 예측하지 말자 저녁이 그냥 저녁의 보폭으로 은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늘에 징검다리 별빛 몇 개 놓아두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불빛에게 스스럼없이 제 몸을 내어주는 저녁에게는 더 이상 도처에서 깜빡이는 불빛의 주소를 묻지 말자 그 불빛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지 말자

박남희, 「저녁에게는」 전문

여기 ‘저녁’이 있습니다. ‘시간’이기도 하고, ‘장소’이기도 한 저녁입니다. ‘어떤 말’이기도 하고 ‘걸음’이기도 한 저녁입니다. ‘저녁’은 어떤 시간일까요? 낮에서 밤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떠올랐던 것들이 가라앉는 시간입니다.

박남희 시인은 이처럼 ‘변화의 시간’, 저녁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변화하는 걸까요?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저녁의 모양과 풍경도 바뀌지만, 찬찬히 시를 읽다 보면 저녁과 같아지려는 ‘내 마음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저녁에게는」 ‘나’와 ‘저녁’이 조용히 주고받는 일종의 ‘대화’입니다. “저녁에”라 말하지 않고 “저녁에게는” 이라고 유정물에 쓰이는 격조사를 사용하는 것은 ‘저녁’을 감정과 감각, 의지와 생각을 지닌 인격체처럼 느껴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와 ‘저녁’은 마치 다르지 않은 하나의 지평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다정한 사이처럼 느껴집니다.

‘나’와 ‘저녁’의 대화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와 주장과 고집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넓은 백지”를 건네며, “붉게 충혈된 산자락의 눈시울”을 닦아 주려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허다한 궁금증과 함부로의 예측을 하지 않고 “저녁 하늘을 날아갈 새들”을 침묵으로 껴안으면 됩니다. “저녁이 저녁답게” “저녁이 그냥 저녁” 일 수 있도록 내 안에 ‘빈자리’와 ‘빈시간’을 허락하는 것이 나와 저녁의 대화입니다.

 

박남희 시인은 “세상의 모든 불빛에게 스스럼없이 제 몸을 내어주는 저녁”과 같이 묵묵히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채워지는 사랑, 거기에서 존재에게 말 건네 오는 시의 언어가 일렁인다고 알려줍니다.

종종거리며 분주한 하루를 쳇바퀴처럼 반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시간 강박증 환자처럼 쫓기는 시간을 끙끙 앓는 우리에게 시인은 말합니다.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연의 시간’ 앞에서 잠시 멈추기를. 겸허히 존재를 비우는 헐거운 시간을 사랑하기를.

예순을 넘기며 한층 깊어진 박남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어쩌다 시간 여행』(여우난골,2023)은 ‘시간’에 관한 성찰입니다. 시인은 ‘시간’과 ‘여행’을 묶어 ‘시간 여행’이라 칭하며 우리의 삶이 길 위에 존재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과 친해지려면 먼저 내 안에 가득한 욕망의 말을 버려야 합니다.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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