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시체가 가득하다

땅만 보고 걷지 않았으면

알아챌 일도 없을 텐데

최재원,「걷기」전문

걷기를 좋아하시나요? 인류 역사는 두 발 걷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걷기는 손에게 자유를, 포식자로부터 도망을, 커진 뇌에 현명함을 선사했습니다.

걷기는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최고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탐험가 엘링 카게는 아무런 장비 없이 오직 걸어서 지구 3극점(북극점, 남극점,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고독한 산책자 루소는 평생 자연 속을 걸었고, 시계 같았던 칸트의 산책은 그의 문장처럼 정확했습니다.

세속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했던 보들레르의 우울한 활보는 커다란 문학적 사건이었습니다. 걷기는 분명 몸이 하는 일인데,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 봉기도 참선도 순례도 모두 걷기입니다. 때로 걷기는 혁명이기도 합니다.

시인 최재원도 ‘걷기’에 집중합니다. 그의 걷기는 ‘어떤 알아챔’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죽음’에 관한 인식입니다. “땅만 보고 걷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죽음입니다.

“발아래” 시선을 두어야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시인이 목도(目睹)하는 발아래 세상은 ‘시체(들)’로 가득합니다.

한때 생명이었던 것들이 중력에 순종해 추락한 세계입니다. 시인은 그 시체를 밟고, 보고, 느끼는 몸의 자각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한 줄일 수도 있을 이 짧은 시를 시인은 굳이 세 줄로 나눴습니다. 걷기, 보기, 알기/ 몸, 마음, 생각 / 행위, 인식, 판단. 이 세 박자의 걸음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가라앉은 죽음은 무거울 수 있지만, 불편하거나 낯설지는 않습니다.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왠지 시인이 걷는 길이 말캉하고 바스락거리는 죽음과 만나는 운명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죽음을 알아챈 시인에게는 슬픔보다 깨달음이 보입니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최재원의 첫 시집『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요?』(민음사,2021)은 몸을 대체하는 기술주의에 저항하는 ‘신체’에 관해 사유합니다. 그의 시가 문명 비판적 메시지로 가득한 이유입니다. 시집을 펼치면「걷기」는 왼편에,「차」는 오른편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두 시를 같이 읽어달라는 주문처럼 보입니다.

차를 영영 사지 말아야겠다

돈도 없거니와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밟고도

모를 것인가

최재원,「차」전문

작가이며 역사가인 레베카 솔닛은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최재원 시인의 시를 읽으며 ‘걷기가 통찰과 결심과 행위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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