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취약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러지고 약해질 때입니다. 취약함은 되도록 피하고 싶기에 애써 감추거나 위장하려 하지만, 불현듯 닥쳐오는 위기 앞에서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발휘하기 힘듭니다. 바닥 난 통장 잔고, 쇠잔해지는 육체, 질시 어린 타인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이가 과연 있을까요?

비록 내 일이 아니어도 단단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절룩이는 길고양이, 횟가루가 덮인 전쟁고아의 얼굴, 힘겨운 노동을 기억하는 아버지의 낡은 작업복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모두 나에게 찾아온 가여운 사랑 때문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사랑의 단상』에서 롤랑 바르트는 불행과 위험에 처한 이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얼어붙은 세상에서 앓는 이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것을 그는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란 밀물과 썰물 같은 것이어서, 닿으려 해도 결국 상대의 고통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실패가 내장된 곤두박질, 그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고운기의「대숲」은 취약한 사랑에 관한 시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말합니다. “드러내지 못할 연인”을 만나 “슬픈 사랑”을 한다고. “당신은 날더러 비밀을 지켜 달라” 합니다. 당신의 “고백”은 오로지 내게 ‘듣는 귀’와 ‘봉인된 입술’만을 요구합니다. 나는 당신이 기구한 사랑을 토로할 “대나무”입니다. 듣기만 해야 하는 “대숲” 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밤거리의 그림자”처럼 “홀로” 외롭습니다. 속절없이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흔들리지 않는 대숲”이어야 하니까요. 이 기울어진 관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사랑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고운기의『고비에서』(청색종이, 2023)는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입니다. 등단 40년을 맞은 시집의 제목 “고비에서”는 ‘사막’이자 ‘인생의 고비’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닙니다. 암 투병과 수술, 지옥 같았던 생의 사투를 기록한 시편들은 검붉지 않고 오히려 담담합니다. 화려한 수사(rhetoric)와 깎은 듯한 언어의 조탁을 멀리한 자리에 시인은 먹먹하고 편안한 사랑의 시를 세웠습니다. “해가 지는 서쪽” “조용히 찾아오는 어둠이 낯설지 않다”(「고비에서」)는 그의 조용한 고백을 들어줄 대숲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강경희 문학평론가 · 갤러리지지향 대표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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