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살 미혼의 여자. 당시 내 손에는 뉴욕행 편도 티켓과 현금 육백만 원이 전부였다. 익숙한 곳을 벗어날 용기는 시간과 돈을 담보로 하지만,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어도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는 화가이자 에세이스트이기도 한 의자 작가의 뉴욕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작자가 화가이기에 직접 그린 미술작품과 삽화가 가득 들어간 그림 에세이이기도 하다. 처음엔 이 제목이 은유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직유였다. 제목 그대로 낯선 곳에서 대책 없이 살았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때때로 외롭고 힘들고 슬프고 처절했지만, 때론 미소가 떠오를 만큼 행복한 순간, 인생에 가장 빛나던 순간들이 그 시간 속에 있었다.

서른다섯,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엔 너무 젊고, 취급하면 조금 어색한 나이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열심히 작품활동을 한 덕분에 의자 작가는 당시 적당히 안락하고 적당히 만족스러운 삶의 조건은 이미 만들었다고 한다.

화가로서, 예술가로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청춘의 시절을 모두 갈아 넣어 어렵사리 이루어 놓은 삶의 기반을 걷어 차버리고, 대책도 없이 뉴욕행을 결심하는 그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다음에 충분히 돈이 모이면’ 같은 말을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나중에’와 ‘다음에’를 기다리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입버릇으로만 중얼거리게 될 것 같았다. 나도 한 번쯤 뉴욕에 살고 싶었다고.”

이 대책 없는 선택 이후 의자 작가는 매 순간 생존을 추구해야 하는, 한순간의 나태함도 용납되지 않는, 그래서 마치 거대한 정글과도 같은 뉴욕의 한복판에서, 살아간다.

그저 살아갔다기보단, 자신의 정체성과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책에서는 그 시간 동안 작가가 겪어 낸 내면의 과정이 가감 없이, 그리고 한없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의자가 본명입니까?” 하고 묻자, 대뜸 톡방에 뜬금없는 이미지 하나가 뜬다. 대형폐기물 수수료 납부 확인서였다. “성명 : 김의자, 페기물명 : 의자”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서 의자 작가는 이렇게 썼다. “이름 관련해서 제 인생에 가장 인상 깊은 일이었죠. 이 스티커를 보며 내가 나를 버리는데 2000원이면 되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ㅋㅋㅋ”

의자 작가는 이렇듯 농담도 잘하는 유쾌한 성격의 예술가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는 그저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아닌, 한 예술가로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낯선 곳에 대책 없이 살고 싶다』는 마치 내시경과도 같은 책이다. 대체 어떤 경험들이 예술가를 만들어 내는지, 예술가로 만드는 사유는 과연 무엇인지 등과 같은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든 사상가든 비슷하다. 자신들이 이룬 결과는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지만, 보통은 그에 이른 과정까지 속속들이 보여 주고 싶어 하진 않는다. 하지만 의자 작가는 다르다.

어쩌면 스스로는 구질구질하게 느낄만한 이야기까지도 망설임 없이 들려준다. 여기엔 내숭도 없고 우아하게 위장하는 몸짓도 없다. 작가는 더없이 정직한 목소리로만 말한다.

작가는 밖으로 나갈 차비조차 없는 낯선 곳에서 무서운 고독감에 혼자 울고 쓰러져 있으면서도 무의식의 저편을 탐구한다. 내면의 빛을 찾아가며 일어서는 작가의 정신이 그림과 문장에서 살아 번뜩인다. 「어려운 쪽을 붙잡는 일」이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 역시도 쉽고 편한 길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안다. 험난한 인생에 쉽고 편한 길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달콤하다. 내 무거운 짐을 다 대신 지어준다는 어느 종교 광고에 마음이 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을 살아내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 재력 좋은 보호자가 갈고닦아준 길이라도 장애물 없는 인생은 없다.

보호막이 사라져 내 심장이 칼바람 맞는 거 같아도, 그 고통 온전히 겪어 내 힘으로 이겨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낯설고 아픈 일을 견디면서 천천히 걸을 수만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젠가 꽃피고 열매 맺지 않을까?”

문장은 잔잔하지만, 내용은 거대한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느낌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로 자신을 세상에 노출하는 일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그런 낯선 곳에 두는 것은, 어려움에 저항하여 나를 성장시키는 일이기도 하고, 그것에서 생의 울림을 발견하고 온전히 나로 태어나는 길이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꽃피는 생명력을 스스로에게서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굉장히 맹렬하다. 거친 소리 하나도 없이, 잔잔하고 담담한 어투로 가장 맹렬한 삶의 태도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인간 정신의 진정한 강인함을 볼 수 있다. 이제 진정으로 강인해진 작가는 인생의 불안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빈 곳’과 함께 사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가의 빈 곳은 허식과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뉴욕에서의 생활을 통해 결국 불안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것이며 그 불안을 어떻게 견디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뉴욕이라는 특별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 세상의 낯선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안겨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 생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얼마나 아끼고 얼마나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을 깨달아 가는 어느 멋진 예술가의 내면적 성장일기이며, 나아가 진정으로 강인한 인간만이 전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용기와 위로를 담은 책이다.

김성신 출판평론가,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겸임교수

​​*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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